곁의 활동

5월 28일 곁의 첫번째 민주주의 역사여행! 공주 동학농민혁명 현장 답사기!

곁지기
2022-05-31

 5월 28일(토) 공주로 떠난 민주주의 역사여행 1탄!!

공주의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찾아서~~!!!


 아침 8시에 출발하여 11시에 공주에 도착한 곁 회원들과 사무국은... <공산성> 을 돌아보며 역사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해뜬으로부터 공산성의 역사, 백제시대 왜 공산성이 이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는지 또 우리가 공주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들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점심을 먹고 본격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현장들을 찾아가는 역사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금강산도 식후경! 이잖아요~)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금강의 풍경                                                            공산성에서의 단체사진!! ^^ 꼼지락의 셀카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오후의 <동학농민혁명 답사길~~~> 

 이번 여행의 해설은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동학해설사 이신 이은영 선생님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오늘의 역사여행 코스는 충청감영터(공주사대부고) -> 송장배미 -> 승주골을 지나 이인면사무소 -> 우금티 전적지 입니다!

 

 1. 충청감영터~ 

  현재 공주사대부고 자리인 충청감영터는 임진왜란 이후 충청도를 관할하는 감영(행정관청) 이 공주로 옮겨오고 여기에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 때 교조신원운동이 1892년 10월에 여기 공주충청감영에 천여명의 동학도들이 '의송단자(진정서)' 를 올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새로 지은 감영의 외관과 터였던 곳에 있었던 돌밖에 없었지만 동학도들이 충청감영으로 진정서를 올리기 위해 전국에서 모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던 자리이자, 동학농민혁명이 공주에서 시작되었던 배경이 되는 곳인 것 같습니다. 

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1892년 동학의 교조신원운동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의 첫 시작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에서부터 였다고 합니다. 


임진년(1892년) 10월 21일, 금영(충청감영)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아니 저기 금영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누구래유?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들 왔대유? 엄청난 숫자로구먼?" " 저 사람들이 동학도인이라는 데요"


2. 송장배미

공주에서 동학농민군들이 몰살 당해 송장들이 쌓여.. 죽은 수많은 농민군들을 쓸허 버린 논이라 하여 '송장배미'라 불린다고 하는 이곳엔 

쓸쓸하게 송장배미라고 쓰여진 비석과 연못 뒷쪽으로 남녀 농민군을 상징하는 조형물 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죽었으면 송장들이 쌓여있었다고 했을까요. 차마 상상조차 안되는 역사의 현장에서 뭐라 할말이 없었습니다.

 비석의 뒷면에 쓰인 글이 궁금하신 분은~~~ 공주에 가시면 꼭 한번 들려보시길 추천합니다!! 


3. 이인면사무소 

이인은 농민군 2차 봉기 후 농민군 주력부대와 관군 간에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고 합니다~
11월 19일(음력 10월 22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이 이인을 점령했고 농민군은 급파된 관군을 맞아 취병산에 진을 치고 이인역을 거점으로 한 관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이인면사무소가 자리한 이 곳에 우금티 전투 당시 관찰사였던 박제순(을사오적 중 한명) 의 거사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방문했을 때는 안타깝게 거사비가 철거중이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는데요. 

당시 농민과 관군, 일본군과의 전투가 곳곳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인을 너머 우금티 까지 농민군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4. 우금티 전적지(최후 격전지)

 분명 지난 모집 메일에서는 우금치! 라고 했었는데.. 왜 우금'티' 냐구요?? 공식적으로는 우금'티' 라고 불르는게 맞다고 합니다. 

 " 공주의 옛 어른들은 '우금치' 라고 하지 않고, '우금티' 또는 '우금고개' 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래서 원래 이름인 '우금티' 또는 

'우금고개'로 불러야 한다고 합니다. 1993년 공주 동학기념사업회 결성이후, 이 사업회와 함께 하신 공주 토박이 어른들은 구상회(향토사학자), 심우성(전 공주민속극박물관장) 선생님 등이 일관되게 이렇게 주장해 오셨으며, 2005년 발간한 책자 <공주와 동학농민혁명> 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정리하였다. 고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최후의 격전지였던.. 우금티 현장, 죽창으로 싸우는 농민들만 줄세워도 10리가 넘었다고 합니다. 일본과 관국의 총 칼에 맞서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도 계속 앞으로 진격하고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심정은 무엇이었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굶어 죽으나 싸워서 죽으나 매 한 가지라고 하지만.. 그 추운 겨울 변변치 않은 옷에 무기라곤 죽창을 들고 싸웠던 동학농민들의 정신이 

지금 이 땅의 민주주의를 이루게 한 시작이었습니다. 반봉건과 반외세, 모든 인간의 평등을 외쳤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농민들의 염원이 우금티 마루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 하였습니다. 

우금티 전적지의 동학농민군 위령탑, 저 현판과 동판의 글씨는 누가 썼을까요? 바로 박정희가 썼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자신이 일으킨 쿠테타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위해 여러가지 역사 왜곡 시도를 했다고 해요. 그래서 화가 난 시민들이 동판에 글씨를 지우려고 한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우금티 마루로 올라가는 길                                                                  동학농민군이 40~50차례 굴하지 않고 교전을 벌이면서도 끝내 넘지 못 한 우금티..


" 우금티를 바로 앞에 두고 일본군과 관군 수십명에 밀려 승주골 골짜기에서 수많은 농민들이 죽고 도망간 것이 아쉬워서 '무릎팍으로 내밀어도 나갈 수 있었는데, 주먹만 내질러도 나갈 수 있었는데' 라는 이야기가 우금티 바로 아래 봉정동 마을에 남아있다." 


우금티 전적지를 끝으로 다시 시작했던 충청감영으로 돌아와 해뜬의 역사퀴즈~~!! 대회를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역사퀴즈대회가 제일 재미있었다는 후문이..  )
다음에는 더 많은 곁 회원들이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첫 번째 역사여행 리포트를 마칩니다!! 



* 첨부 

 + 동학의 사상 

 1894년 조선 전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학사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동학사상은 노비나 어린아이 그리고 

여성들을 모두 '한울님-하늘님' 으로 대접한다. 동학의 차별없는 인간해방사상은 신분차별과 수탈에 시달리던 민중들을 결집시켰다. 

 <인간존중사상> 

 - 사람은 천주(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 (시천주, 侍天主) 로 보았다.  이러한 인간관에 의하여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 (사인여천, 事人如天) 사상과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 人乃天) 이라는 사상으로 전개된다. 

 - 동학 창시자 최제우 선생은 득도하면서 자기 집안 노비를 1명은 며느리로 삼고, 1명은 수양딸로 삼아 신분해방을 실천했다. 

<유무상자(有無相資) 의 정신, 나눔의 사상> 

 - 1888년 무자년의 대흉년을 맞이하여, 가진 자든지 없는 자든지 서로 돕도록 했다. 

 <생명존중사상 (삼경사상)>

 - 사람뿐 만 아니라 천지만물, 즉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도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사상이다. 


 +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

- 반 왕조 운동 : 부패한 조선왕조체제 개혁과 신분해방(노비제 폐지) 운동

- 반일(반외세) 운동 : 동학농민혁명의 공주싸움(우금티 전투)은 침략자 일제에 항거한 항일구국운동

- 전국적 농민봉기 :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인구 1/3이 참가, 남접과 북접동학농민군의 전국적 활동과 공주지역 농민군의 자주적 활동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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